제암리 학살 – 일본의 만행



제암리 학살은 3·1운동사를 정리할 때 빠짐없이 기록되는 사건이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지금의 화성시인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웠다.
비명을 지르며 총살하는 끔찍하고 비인도적인 민간인 학살이다.

당시 수원과 화성의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절정에 이르렀고,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 장날에는 1,000여명의 인파가 모여 만세를 외쳤다.
. 이 시위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성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고 변전소와 일본 상점도 불에 탔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숨졌고 인근 고주리에서도 6명이 숨졌다.

– 주요 상황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수원·화성 일대의 만세만세 시위가 격렬해졌다.
장날에는 700여명의 인파가 경찰서 앞에 모였다.
전투를 이끈 홍면이 일본 순경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자 성난 군중이 그를 죽였다.
29일 장날 성호면 오산리에서 8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유진홍, 안동순 등 주모자 7명이 체포되자 군중은 변전소와 우체국,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본 상점과 가옥에 불을 질렀다.
밤중에 수원 일대 곳곳에서 횃불 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때다.
3월 31일 발안리 장날 시위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중과 일본 헌병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조선인 3명이 다쳤을 때 분노한 군중이 일본 경찰을 사살했다.
그들은 또한 일본의 초등학교, 우체국, 마을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4월 3일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과 장안면 석포리, 수촌리 주민들이 합세해 매우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장안면 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쳤고 우정면 사무소와 화수리 변전소에 돌을 던졌다.
이미 1,5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에 대한 일본헌병대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변전소 헌병의 발포에 흥분한 군중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변전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 순경을 사살했다.
일본 제국은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4월 3일 장안면 화수리에서 2,0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에서 일본 경찰 1명이 숨지는 등 진압작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수촌리 출신 김교철·백낙열·차인범·정순영·이순모 등이 검거되었고 민가 수십채가 소실되었다.
진압부대는 4월 6일 경성으로 철수하였으나 발안리 일대에서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4월 9일부터 16일까지 2차 진압을 실시하였다.
리, 주모자를 체포하고 민간 주택에 무차별 방화. 일본 기록에 따르면 2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진압 작전에서 803명이 체포되고 1,202명이 석방되었으며 10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276호도 불에 탔습니다.

3월 31일 시위 이후 일본군과 경찰은 발안리 일대를 진압기지로 삼았다.
‘서쪽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발안리와 제암리, 고주리를 확보하면 시위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압부대가 발안리를 떠난 4월 12일,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육군 79연대가 도착해 이곳의 경비를 맡았다.
15일 오후 2시경 발안리 시장에서 400여 명이 또다시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를 해산한 아리타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오후 4시경 제암리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1명은 발안리에 거주하던 조선인 병장 조희창과 일본인 사사 등의 협력으로 제암리 주민들의 탈출로를 막고 20여 명을 소집했다.
주민들이 교회에 교회 안에서 훈계를 마친 아리타는 즉시 발포 명령을 내렸다.
총격이 끝난 후 그는 교회에 기름을 바르고 불을 질렀다.
여러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밖에서 기다리던 군인들에게 살해당했고 노경태만 살아남았다.
고주리에서는 군인들이 천도교 김흥렬 등 6명을 사살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 일본 후처리
제암리 학살이 알려지고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가혹한 보호관찰만 부과하는 등 사태를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일본에 대한 세계 여론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김완섭은 “당시 조선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학살은 일본군이 누구였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일부 헌병대 병력이 일반 경호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경호업무를 했기 때문에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당시 조선 수비대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 학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련 병사들은 30일간 보호관찰을 받았고, 학살 현장을 담당했던 제79보병연대 아리타 중위는 이후 군법회의 결과 살인과 방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